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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199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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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22 16:50:53

가나안 기도원 배덕민의 작은 자서전3. 가나안 기도원

97년 1월 18일 나는 기도원 차에 몸을 싣고 나왔다. 충주에서 40분 더 가면 산넘고 강건너 깊은 골짜기에 기도원이 있었다. 가서보니 나의 상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2층 단독 주택에는 원장이 살고 있고 그 옆에는 조립식의 작은 교회가 있었고 개가 40마리 와 소가 30마리 있었다.
그 곳은 지옥이었다. 남,여가 모두 80~90명이 있었다. 60%가 정신질환자이고 나머지는 알코올 중독자였다. 부업으로 마늘을 깠다. 아침과 점심을 먹은 뒤에는 마늘을 까고 저녁 7시에는 기도를 드렸다. 처음에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니 미칠 것만 같았다. 새벽 4시 반에 정신질환자 등에 업히고 75m 거리를 가는 동안 차가운 바람이 살 속 깊숙히 파고 드는 느낌이었다. 우리 작은 형에게 기도원을 소개해준 작은 형수의 친구가 때려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웠다. 차가운 교회 바닥에서 두 손모아 기도를 했다. 여기서 빨리 나가게 해 달라고 매일, 매일, 매일...
그 곳의 생활은 정말로 비위생적이었다. 아침은 7시 점심은 12시, 저녁은 6시 그런데 밥 먹는 시간이 5~6분.. 최대한 빨리 먹어야 한다. 왜냐하면 마늘을 까야하기 때문이다. 마늘을 까는 이유는 그 곳의 구성원의 절반이 버려진 사람들이어서 밥값을 벌어야 하기 때문이다. 가족들은 한 두달 밥값 내다가 이사 간다. 아니면 5~6개월 동안 밥값을 미루거나 아무 소식이 없거나 그렇기 때문에 부업으로 마늘을 깐다. 1kg에 1400원을 번다. 80~90명이 모두 달라 붙어서 마늘을 깐다. 그것도 꽤 짭짤한 수입이었을 것이다. 마늘까는 이유는 또 한가지가 있다. 마늘을 안 까면 정신질환자들이 분산되고, 파악이 안되고 그래서 마늘을 깐다. 한마디로 웃기는 말이다. 우리는 비록 쌀을 먹었으나 그 쌀들은 국산이 아니었다. 중국, 인도에서 수입해온 쌀이었다. 게다가 대부분 재고품이었다. 밥 숫가락으로 밥을 푸면 밥이 날아갔다. 그만큼 기름기가 전혀 없는 쌀이었다. 아무리 맣이 먹어도 배가 고팠다. 또 국은 아무 양념없이 소금과 마늘만 집어 넣은 국이었다. 우거지국, 씨래기국, 감자국 그것들뿐이었다. 반찬은 반양념 된 김치뿐이었다. 언젠가는 10년도 지난 참치캔을 주기도 했다. 그것도, 더 먹으려고 치열하게 싸웠다. 점심엔 아무 양념이 안된 국수도 게걸스럽게 먹었다. 그리고 수프가 없는 라면만 오십개, 개들이 먹는 것 그것을 사다놓고 점심엔 그것을 주었다. 한마디로 비참한 생활이었다.
가끔 원장이 한달에 2~3번 돼지머리 9~10개를 사왔다. 그것을 국을 만들어 먹었다. 그것도 더 먹고 싶어서 싸웠다. 오래 간만에 뱃속에 기름이 들어가서 설사를 많이 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가끔 원장이 낚시를 좋아해서 한번 가면 향어를 20~30마리를 잡아왔다. 그걸 갖고 매운탕 끓여 먹고 회도 먹었다. 그것뿐이었다. 내가 그곳에 있는동안 한달에 한명씩 죽어갔다. 못 먹어서 죽고 간질 발작이 일어나서 죽고, 죽을 때가 되어서 죽었다. 대부분의 경우 보호자들이 죽을 때가 되면 거기에 보내곤 했다. 심지어는 보호자가 시체를 안 찾아가서 해부실로 보내기도 했다. 나는 죽은 시체 옆에서 밥을 먹은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참 비참하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잘 때는 60명이 한방에서 세줄로 잤다. 도망가지 않게 밖에서 문을 잠갔다. 저 구석에는 페인트통이 있었는데 대변용이었고 막걸리통 두개는 소변용이었다. 나는 그 옆에서 잤다. 그 옆에서 자는 이유는 오줌 누기가 편해서였다. 냄새는 정말 심하게 났다. 내가 그 곳에서 있는 동안 딱 한번 이불을 빨았다. 마치 돼지우리같은 곳이었다. 나는 3개월만에 머리를 처음 감았다. 그곳은 말을 안 듣거나 술먹고 싶어서 금단현상을 보이면 컨테이너에 가두곤 했다. 내가 오기전에 두 사람이 도망가서 충주 MBC 에서 취재나왔다. 그런데 현실과 다르게 좋게 나왔다. 매일매일이 마음 괴로운 나날들이었다.
봄에 대구에서 어떤 사람이 붙잡혀 왔다. 그 사람은 건축사업을 하다가 망해서 아내와 별거까지 하고 식당하는 누나 집에서 지냈는데 누나가 두고 볼 수 없어서 기도원에 연락했다. 그 사람의 이름은 김상향 나이는 그 당시 43이었다. 독실한 크리스챤이었다. 내게 큰 도움이 되주었다. 그사람과 공통점은 우리 어머니와 한 본이다. 그리고 나하고 띠가 같고, 우리 아버지 고향이 같았다. 나하고 많은 이야기를 했다. 흔히 눈물젖은 빵을 먹어본 사람은 극히 일부분이다. 나는 눈물 젖은 빵은 아니고 비참한 빵을 먹어본 적이 있다. 그 사람이 자기 안먹고 빵 하나를 내 입에 넣어 주었다. 그 빵을 먹은 순간 ‘세상에 이렇게 비참할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빵은 입에 들어가자 마자 녹았다. 난 그 빵의 맛을 죽을 때까지 잊지 않을 것이다. 또 사탕이 생기면 반을 쪼개서 그 반을 내 입에 넣어 주었다. 난 그 사람의 덕을 많이 보았다. 그 사람은 목욕도 시켜주고 내 불편한 점을 해결시켜주기 위해 원장 모르게 우리 형에게 내 부탁을 받고 연락 해 주었다. 지금도 한 번 참 만나보고 싶다. 거기는 한 겨울에도 뜨거운 물이 없었다. 뜨거운 물을 만드려면 가마솥에 물을 붓고 장작을 때워야 했다. 여름은 지내기가 어렵지 않으나 겨울에는 불이 안들어 와서 내가 좀 힘들었다. 왜 80~90명이 마늘을 까고 그 냄새가 안나갔는지 모르겠다. 마음도 못놓고 자유도 없었다. 그곳은 휴지도 없었고 신문지도 구하기 힘들고, 그래서 사료종이로 밑을 닦아야 했다.
그 곳 원장은 장로고, 아내는 전도사였다. 매주 일요일마다 아침 9시에 주일 예배를 보았다. 나는 요한의 집에서 그랬듯이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려 보냈다. 그 곳에서는 마늘깐다고 눈깔사탕 2개와 건빵 몇 개의 간식을 주었다. 나는 그 곳에서 여름에는 눕지를 못했다. 왜냐하면 파리가 온몸에 달라붙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곳은 일주일에 1번 씻었다. 칫솔이 없어서 공동으로 씻었다. 그 이유는 물품이 없는 것이 아닌데도 어디가 몸이 아퍼도 약을 주질 않았다. 기도하면 낫는다고 하면서... 원장 내외는 같은 방에서 먹되 따로 작은 밥상에 먹었다. 먹다가 남은 음식이 있으면 그것도 아무나 안주고 마늘 반장이나 집사를 주었다. 그들은 미친듯이 먹었다. 언제 나갈지 기약도 없이 비참한 나날이 지나갔다. 그러다가 8개월만에 형이 왔다. 나는 뭐라고 말로 할 수 없었다. 온몸에 땀띠가 난 내 모습을 보면 우리 형이 뭐라고 할까.. 잠깐 나가서 오랜만에 돼지 족발을 먹고 왔다. 그 후에는 대우가 좀더 나아졌다.
그곳에서는 여자들도 여자 관리인이 없어서 바지나 치마에 피묻은 대로 그냥 돌아다녔다. 한 여자 아이는 너무 미쳐서 개밥까지 주워 먹고 돌아다녔다. 나는 목욕을 여자들이 있는 곳에서 할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알코올 중독자들이 남자 수용자들을 관리했다. 개밥도 주고 소밥도 주었다. 그리고 원장이 일주일에 1~2번 담배를 주었다. 난 거기서도, 하루에 2~3 가피 얻어 폈다. 정말로 꿀맛이었다. 원장, 전도사는 돈만 버는게 목적이었다. 또 한사람이 붙잡혀오면 한사람이 도망갔다. 매일 이런 식이었다.
그 기도원은 알콜 중독자들이 조금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 욕정을 못이겨 정신 질환자 가운데 여자를 건드려 아이까지 낳고 그 아이는 원장 임의대로 홀트 아동재단에 보내고 그리고 그 사람들은 거기서 아무렇지않게 살았다. 아이낳고 그 아이 먹는 우유는 엄마가 뺏어먹었다. 그만큼 미친 여자들이 있었다. 또 한번은 배가 점점 불러와서 원장맘대로 보호자한테 보내기도 하고, 이런 일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참으로 개돼지만도 못한 사람들과 같이 있다는 것이 더욱 비참할 뿐이었다.
봄에 또 50살도 넘어 보이는 사람이 또 붙잡혀 왔다. 그 사람의 직업은 축산업이었다. 술을 하도 많이 먹어서 아내가 기도원으로 보냈다. 한두달 정도 있다가 어떤 사람하고 공모해서 둘이 도망갔다. 그 사람은 도망가고 한사람은 붙잡혀 왔다. 엄청 두들겨 맞았다. 모든 사람들이 원장에게 잘보이기 위해서 과잉충성 행동을 했다. 그리고 며칠 후 아들이 찾아와 데리고 갔다. 그리고 15일후 그 사람이 연락해 서울 KBS 취재팀과 충주 경찰이 들이 닥쳤다. 그것은 순식간이었다. 2시간동안 취재하고 갔다. 나는 속으로 쾌감을 느꼈다. ‘이것이 나에게 찾아온 기회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못 보았지만 98년 7월 12일 9시 뉴스로 방영이 되었다. 그 다음날 막바로 검찰과 경찰이 왔다. 그리고서는 각자 사진을 찍었다. 그 날 밤은 경관들이 원장을 감시했다. 그게 전부였다. 또 그 다음날 일부는 꽃동네로 보내고 일부는 자기 가족들이 데리고 갔다. 나머지 사람들과 나같은 장애인들만 남게 되었다. 1년 6개월 그 지겨운 날들이 모두 가고 지금와서 생각하면 30년동안 호강만 하다가 기도원에 가서 내 나름대로 고생을 많이 했는데 그것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내려주신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그 기도원에서 1년 6개월동안의 비참한 생활들을 잊지 못한다. 그래도 좋은 점이 있다면 나에게 인생공부를 맣이 하게 해주었다는 점. 그 곳은 한마디로 정말 기도원이다. 마늘을 까지 않고 쉬는 날이면 하루 종일 찬송가를 불렀다. 사람들이 들으면 신앙인의 생활을 하니 좋았겠다고 하겠지만 사실은 오히려 더 괴로웠을 뿐이었다. 왜냐하면 원장이나 그 아내나 돈밖에 모르기 때문이다.
거기도 돈 가진 사람이 몇 사람이 있었다. 원장 내외가 일주일에 두세번씩 낚시터에 가면 아무도 모르게 술 사다먹고 그랬다. 98년이 오고부터 IMF 바람에 그나마 소금국도 못 먹었다. 쉬꼬부라진 초국댄 김치하고 밥 그것뿐이었다. 도저히 목구멍으로 안 넘어갔다. 나는 기대를 포기하지 않았다. 언젠가 이 지옥에서 나갈수 있는 날을 생각했다. 그 기도원은 내가 오기 전에 1년에 한두번씩 목사님을 초빙해서 부흥회를 열었다. 마늘까기 전에는 부흥회가 철야를 하였다. 그런데 마늘을 까고나서부터는 9시나 10시에 끝났다. 그것도 아무 의미 없는 부흥회였다. 그리고 그 곳은 무조건 사람을 붙잡아 오면 쇠사슬로 두발을 묶었다. 마음이 진정되면 풀러주었다. 내가 처음 6개월 동안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고 싶어도 아무도 주는 사람이 없었다. 왜.. 오줌 버려줄 사람이 없어서 먹고 싶어도 안 주었다. 정말로, 목 마른 사람의 심정이 이렇게 비참할 수 있을까? 그리고 나에 대한 대우는 가히 나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우리 형이 한달에 한 번 온라인으로 꼬박꼬박 밥값을 붙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 한달에 한번 시에서 쌀이 나왔다. 그래도 특별한 대우는 없었다. 잊어지기 보다는 자꾸 더 생생하게 기억이 자꾸만 머리속에 남아있다. 하루 빨리 지워지면 좋겠다.
나는 그 곳에서 5월부터 기침때문에 밤새도록 거의 자지를 못 하였다. 이상하게도 하루에 똥을 2~3번 누었고 얼굴도 핏기가 없고 힘도 없었다. 어쨌든 그 날로 기도원은 폐쇄되었고 나하고 또 한사람은 시에서 임시로 장애인시설로 보내졌다.

 

다음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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