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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199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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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19 16:46:55

2. 요한의 집


지금으로부터 5년전, 94년 7월 18일 그렇게 나는 결국 집에서 나왔다. 좀 나이 먹어서 나오긴 했지만 미련은 없다.

전화를 거니까 요한의 집 차가 왔다. 우리집에서 차를 타고 5~6분 거리에 있는 시골에 요한의 집이 있었다. 가서 보니 정말로 어머님의 말씀이 사실이었다. 그 집의 원장님께선 전신 뇌성마비로 목만 움직이고 말만 할 뿐이지 전혀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그 곳에 머무르며 원장님과 나는 서로를 알기 때문에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어머니께서 한가지 나에게 말씀하지 않으신 것이 있었다. 원장님께는 아내도 있었고 자식도 있었다. 아내는 똑똑한 정상인 여자였다. 자식도 정상인이었다. 나는 한참동안 신기하게 생각했다. 그 생각도 잠시뿐, 하루 이틀 지나고 집에 전화를 해보니 어머니께선 왠일인지 전화를 받지 않으시고 피하셨다. 나는 버려졌다는 생각에 슬퍼했다.

어머니와 작은형이 와서 나의 맘을 진정시켜 놓은 후 한달에 한번 집에 다녀가라고 했는데 그것도 실은 말뿐이었다. 팔월 보름전날 어머니께서 오셔서 몇시간 동안 이야기하고 가셨다. 그 후로는 지금껏 어머니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지금은 생사도 모르고 있다. 나는 포기하고 그 집에서 생활했다. 요한의 집에는 방이 7개 있었고, 남자 9명, 여자 7명이 살고 있었다. 여자 한 명은 뇌성마비와 소아마비를 앓고 있는 중복장애자였다. 그 나머지는 정신지체, 자폐증 환자등이다. 그 가운데 나도 끼어 있었다.

내가 그 집에 있는 덕분에 바람을 좀 많이 쐬었다. 대전 엑스포에도 가보고, 독립기념관도 갔었고 화양계곡도 갔다. 미리내, 수원 축구장, 삼성전자 공장에도 가보았다. 그리고 원장님을 따라서 간 보라매 공원에 있는 장애자 복지관에서 뇌성마비 장애자 모임에도 참석하고 가을에는 내장산에 단풍놀이도 가보았다. 시간이 남아서 명동성당에서 하는 저녁 미사도 보고 남대문 시장도 둘러보고 둘로보고 했다. 또 그 곳에 머무르면서 의료보험, 장애자 수첩, 생활보호 대상자 등록도 하였다.

포기는 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무언가 미련이 남아있었다. 내가 그집에서 이년 육개월동안 살았지만, 그 중에서 육개월만이 행목했던 나날이었다. 나머지는 언제나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괴로움과 소외감에 젖어있었다. 우리 작은형이 집이 가까우니까 한 달에 한번정도 와서 용돈 5~10만원을 주고 갔다. 그 돈으로 옷을 사입고 담배도 사서 피고 술도 먹고 그랬다. 일주일에 거의 매일을 술을 마시다시피 했다. 빈 병이 치우기가 어려워서 팩에 담긴 술을 사서 마시고 불태워 없앴다. 그 술은 같은 방에 있는 사람들끼리 먹었다. 사모님과의 갈등이 있었고 또 내 자신이 싫어졌다. 그 이유 중에 한가지는

“왜 너는 내 남편보다 훨씬 몸 상태도 좋은데 매일마다 술이나 처먹고 그 전 생활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고민만하느냐! 깊은 신앙도 없고 매일마다 우거지 죽상으로 괴로운 나날들만 보내냐!”

라고 나에게 사모님이 소리르 지르는 것이었다. 사실 원장님은 자수성가한 사람이다. 그 사람은 전신 뇌성마비로 부모님과 동기간들에게 있는 구박 없는 구박을 다 받으면서 생활을 하였다. 어느날 어머니가 잠자고 있는 그의 머리 밑에 극약을 놔두고 나가버렸다. 그리고 때마침 동네 친구가 놀러와서 그 현장을 보고 원장을 등에 업고 집에서 나왔다고 한다. 이리저리 헤매다가 서울 국립 명원으로 붙잡혀 들어갔다고 한다. 그런데 그곳은 어의 알몸으로 매일마다 몽둥이로 두들겨 맞는 생활을 한다고 한다. 하루에 한명씩 죽어나간다고 하는데, 그 시체를 다름아닌 해부 실험용으로 쓴다고 한다. 그런데 원장님은 신체 구조가 너무나도 신기한 나머지 죽지도 않았는데 병원 측에서 일방적으로 해부 실험날짜를 잡아 놨다고 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알게 된 원장님은 우연히 그 병원을 면회 온 군인 아저씨의 도움으로 DOUBLE BAG에 몸을 숨겨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고 했다. 그 뒤로 그는 신학생을 만나서 그곳에서 기거를 했는데 원장님은 너무나도 신앙이 깊은 나머지 신앙 생활을 하기 위해 부산으로 내려갔는데 그곳에서 어느 여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녀가 바로 꿈속에서 예수님께서 점지해 주신 아내감이었다. 어쨌든 그 여자와 원장님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볼일을 보고 올라가는 날 그 여자보고 그랬다고 한다.

“네가 죽을 때까지 나의 손발이 되어주면 미련없이 올라오고 아니면 그냥 있어라.”

그 얘기만 해놓고 원장님은 떠났다. 며칠후 그 여자는 오빠와 언니들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옷 보따리만 갖고 도망가다시피 그 원장님있는 곳으로 갔다. 백일동안 기도를 드리고, 80년인가 81년인가에 결혼식을 올렸다. 장애인 손주를 둔 할머니집 단칸방에 기지를 했다. 그 곳에서 힘든 생활을 하고 있다가 잘 아는 신부님의 권유로 신부님이 주신 이백만원을 가지고 경기도 송탄 시골에 이사왔다.

다 쓰러져가는 집을 구해서 새로 수리를 하고 89년에 ‘요한의 집’ 간판을 지었다. 그만큼 훌륭한 원장님인데 나는 거기에 비해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고 생각한다.

나는 내 나름대로 나의 세계가 있다. 그런데 사모님은 나의 세계를 깨부수로 자기의 세계에 나를 구속시키려고 한다. 나는 그것이 정말 싫었다. 내가 조금만 실수를 하고 하찮은 말다툼을 하면 형한테 전화한다고 했다. 듣기가 좋은 말도 한두번이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간다고 했다. 그리고 형집에나 우리집에나 너무 가깝다. 그것도 골치 아프고 한번쯤 집에서 멀리 가보고 싶었다. 내 인생은 내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일단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우리 형에게 좀 미안하다는 것이 마음 아팠지만 할 수 없이 가기로 했다. 사모님과 우리 형은 갈등이 좀 있었다. 그것은 한달에 한 번 형은 성의껏 작은 봉투를 주었는데, 사모님은 그것을 싫어했다. 형의 입장에서는 그럴수가 없다고 했다. 내가 봐도 돈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있나? 그 문제와 사모님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요한의 집에는 원장님만 빼고 정신지체, 정박아, 자폐아등이 있는 곳인데, 너 같이 똑똑한 놈은 우리집에 있을 필요가 없다. 나도 그말이 맞는 것같다.

그 집에서 2년 6개월 살았지만 항상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점점 더 커져갔다. 그리고 소외감만 느끼고 하루하루가 지겨운 날들만 보낸다. 그런데 집에 나롸 첫번째 만난 사람들은 너무너무 좋다. 원장님이나 그의 아내나 만난게 행운이었다. 내가 후에 거기서 나온 것은 나와의 싸움에서 졌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깐 내가 있었던 요한의 집에 대해서 소개하겠다. 요한의 집 원장이 95년 4월에 있는 장애인의 날에 김영삼 대통령상을 수상하였다. 그리고 우리 일행은 따로 수원 시민회관에서 장애인의 날 기념식에 참석했다. 그 당시에 SBS 휴먼다큐 ‘사랑의 징검다리’ 촬영팀이 3일동안 촬영을 해갔다. 나도 출연하긴 했는데 내가 일부러 피하고 지저분하게 행동했다. TV를 보니까 나는 안 나왔다. 천만다행이라 생각했다.

이번엔 진짜로 모든 마음을 비우고 검정고시를 치루려고 초등학교 1학년부터 6학년까지의 전과를 구해서 공부를 시작했다. 구구단을 한달만에 외웠지만 국어와 수학은 무척 어려웠다. 그렇게 공부하고 있었는데 96년 5월 토요일 오후에 우리 방에 있는 사람이 문을 잠근 뒤 불을 질러 자살했다. 그 때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자면 내가 점심을 먹고 담배를 한 대 피운 뒤 다음날이 주말예배날이었기 때문에 머리를 감고 있었는데 어디서 갑자기 이상한 냄새가 나더니 누군가가 ‘불이다’하며 뛰어나왔다. 나는 얼른 불을 피했다. 내가 3분만 늦게 들어왔어도 나는 죽었을 것이다. 불은 순식간에 번졌고 119에서 와도 소용이 없었다. 그 사람은 죽고 나머지 사람들은 다행이도 목숨을 건졌다. 한가지 이상한 점은 기도방은 멀쩡했다. 정말로 이상한 일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을회관에서 두 달동안 마을사람들의 따가운 눈초리를 받고 지내야했다. 난 내가 22살이 되는 88월 5월에 나의 자서전을 직접 썼었지만, 그만 요한의 집 화재로 없어져 버렸다. 그것 뿐만이 아니라 요한의 집에서 죽을 때까지 있는다고 가지고 왔던 TV와 오디오, 옷장 그리고 책들 모드가 없어져 버렸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별로 아깝지 않다.

요한의 집에 있었을 때 거의 2년동안을 잘 때 가위눌리는 꿈을 꾸었다. 화재로 마을 회관에 있을 적에 어머니께서 심장 수술을 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또 우리 남자 조카 놈이 자폐아라는 진단을 졍원에서 내렸다. 그 소식을 듣는 순간 나는 마음이 매우 착잡했었다.

그런 생활을 하다가 결국 우리는 그 곳을 나와 비닐하우스에 갑바를 두르고 그 곳에서 생활을 해야 했다. 여름에는 살인적인 더위가 찾아왔다. 어느 날 오후에 카메라를 들고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내가 가방과 우유를 먹는 걸 찍어갔다. 그런데 그 뒤에 보니 10월 16일자 조선일보에 사회면에 사진이 실렸다. 그 신문을 보고 삼성반도체에서 와서

요한의 집이 화재 나기 전에 원자님은 1억 500 만원 짜리 땅을 2000만원 주고 계약했다. 잔금은 작계에 독지가들이 도와주는 바람에 잔금을 치렀다. 그 다음 문제는 얘기를 들어보면 화재가 난 후 1년 후에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그런데 IMF 바람에 조금 힘들다고 한다. 98년에는 9시 뉴스에서 나오고 사랑의 리케이트 프로에 나와서 성금 2000만원 모으고 그랬다고 한다. 지금도 소식을 있다. 그런데 전화할때는 아무 생각없이 안부나 물어볼들어보면 건물 다 짓고 잘 지낸다고 한다. 나는 궁금하기도 하고 안부나 전할까 해서 98년 1월에 전화 두번 해보았는데 일방적으로 귾었다. 그 이유는 다른게 아니라 내가 귀찮아 할까봐 일방적으로 끊은 것같다. 내가 기도원 차를 타기전 원장님께서 나보고 형식적으로 하는 말이 1년후에 보자고 그랬다. 나는 그 말을 기억하고 까 해서 전화를 했는데 원장님이 생각은 나와 전혀 달랐다. 사람들이 다 내 마음같지 않았다. 지금도 우리 형에게 할말은 없다. 내가 그렇게 골통짓을 했으니까 하나님이 기도원으로 보냈나보다. 난 지금도 요한의 집에 나오고 한번도 후회해 본적이 없다. 그리고 그 기고원에 가서도 후회해 본적이 없다. 나는 후회는 안한다. 내 사고방식이 물든 컵이 엎지러진 물, 언젠간 엎질러 질거다. 그게 하루가 되든 십년이 되든 엎지러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난 후회하지 않는다. 다만 어머니께 불효한것 그게 마음에 걸린 뿐 딴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 자신도 싫고 우리형이 너무 급하게 알아본 나머지 형수의 친구가 소개해준 그 기도원으로 갔다.

 

다음에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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