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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1999 2편
관리자 조회수:674 121.129.203.203
2014-06-11 16:44:48

보기에 직접적인 정은 주지 않으셨지만 간접적으로 정을 많이 주신 것 같다. 우리 형제는 아버지께 매를 많이 맞았고 그 중에서 특히 내가 가장 많이 맞았다. 그래도 그 덕분에 내가 바르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우리 아버지 같은 아버지도 없을 것이다. 일치 감치 우리에게 성교육을 하셨고 선과 악을 올바르게 가르쳐 주셨다. 정말로 완벽한 분이셨다. 그러나 그런 아버지에게도 크나 큰 단점이 있었다. 바로 마작을 너무나도 좋아하셨다는 것이다. 한 번 나가시면 2,3일을 안들어오시는 것은 기본이었다. 돈도 수없이 많이 쓰고 오셨다. 그러고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시면 어머니께서는 분에 못 이기셔서 아버지의 옷을 잡고 부이 풀릴때까지 흔드셨다. 난 그런 모습을 10년 넘게 보고 자랐다. 보수적이고 완고하신 아버지도 나이가 드셔서인지 갈 수록 나에게 훨씬 부드러워 지셨다. 아버지께서는 우리들에게 항상 말씀하셨다. 공부보다 올바른 사람이 되라고…. 사람의 도리도 하고 남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라고 귀가 따갑도록 말씀하셨다. 우리 아버지는 한번도 몸이 앓으신 적이 없어셔서 병원에 가신 적이 없다. 그러셨던 분이 85년 봄에 갑자기 심장 마비로 돌아가셨다. 난 그 후에 두세번씩 아버지의 무덤에 가보았다. 지금은 묘자리가 어디에 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언제 한번 기회가 생기면 가야할 텐데 기회가 없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나에게 이상한 일이 생겼다. 1년에 한번씩 감기 몸살과 같은 병이 걸리는 것이다. 한 번 앓아눕기 시작하면 1,2주일씩 일불을 깔고 앓아 눕게 된다. 아무 것도 못 먹고. 참 이상한 일이다. 집에 나오고부터는 그런 병이 없어졌다.
우리어머니는 나를 어릴 적부터 장애자 시설로 자꾸만 보내려고 했는데 그 때마다 아버지의 반대가 있었다. “누가 이 새끼의 우줌,똥을 받아놓나? 부모가 하기 싫은데 남을 고생시길 것이 뭐가 있나!” 하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가끔 이런 식으로 말다툼을 하셨다.
나는 이상하게 아버지의 꿈만 꾸면 꿈 속에서도 짜증이 난다. 그 때마다 실패했는데 지금은 꿈에 아버지가 보이지 않는다. 아버지는 생전에 나에게 귀가 따갑게 말씀하셨다. “니가 먼저 죽어야지 내가 마음놓고 죽을 수 있지. 니가 안죽고 끝까지 남 고생만 시키면 내가 어떻게 죽냐!” 하셨다. 지금도 그 말이 기억이 난다. 내가 한참 비탄에 빠졌을 적에 아버지보고 왜 나를 낳았냐고 울부짖었다.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계셨다. 그것을 지금 생각하면 아버지의 가슴에 못질을 한 것 같다. 아버지는 내게 깊은 정은 안주셨지만 나는 언제나 아버지를 사랑하고 있었다. 어쨌든 나는 아버지를 영영 볼 수 없게 되었다. 한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이버지의 임종을 못보았다는 것이다.
사실 나는 나에게 사춘기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큰 착각이었다. 82년 겨울 나보다 3살 많은 여자를 보았다. 그 당시 그 여자의 나이는 19살이었고 나의 나이는 16살이었다. 그 동안 억압되어온 나의 감정들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듯 했다. 나는 맹목적으로 그 여자를 좋아했다. 그게 짝사랑인지 첫사랑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는 그 여자를 좋아했다. 그 여자가 없으면 왠지 허전하고 쓸쓸했다. 마음도 불안하고 세상이 재미가 없었다. 그러나 그 여자는 나를 동생처럼 생각했다. 나는 한 여자로 좋아했는데 말이다. 답답한 마음에 나는 그 여자에게 나쁜 짓을 했고 그 여자는 결국 나에게서 완전히 멀어져 갔다. 나는 그 여자에게 용서를 빌었지만 그 여자는 묵묵부답이었다. 그 때마다 난 미칠 것만 같았다. 내 눈엔 그 여자만 보이고 어머니와 아버지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 때에는 왜 그렇게 했는지 나도 모르겠다. 아마도 그 때에는 나의 왕성한 성욕을 이기지 못해서 그랬던 것 같다. 우리 뇌성마비들은 좀 변태적인 성향이 있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릴 적 부터 부모님이 매춘업을 하셨기 때문인지 나도 그런 기질이 좀 있었다. 그래서인지 나도 여자를 너무 밝혔다. 사춘기 시절에 지독한 사랑을 해본 나는 지금은 그 전하고 완전히 다르게 여자가 지나가는 모습을 보면 강아지가 지나가는 모습과 같아보인다. 그렇게 밝히던 나였지만 나는 지금까지 성관계를 한번도 가져본 적이 없다. 기회는 많이 있었다. 하지만, 죄책감이 많이 들었다. 그렇다고 성관계만 갖지 않았을 뿐 간접적으로 해 본 경험은 많다. 지금도 여자만 보면 좀 죄스러운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나도 그렇게 나쁜 놈은 아니다. 누구든지 성인군자는 아니다. 나도 남자이니까. 어쨌든, 그 뒤로 거의 2년동안 앓았다. 어머니는 그 때 나 때문에 새로 병을 얻고야 마셨다. 나는 그제야 어머니께서 평소에 하시던 말씀을 깨달았다. 여자는 요물이다는 것을 말이다. 그 여자와의 8년 동안의 만남은 그것으로 끝이 났고, 지금은 그 여자는 두 아이의 어머니가 되었다. 아픔은 많았지만 지금와서 생각해 보면 그때가 좋았다.
그런데 내가 그 여자에게 한참 미쳐있던 어느날 밤 자다가 눈을 떠보니 내 배위에 아버지가 계셨다 내 목에는 전기줄이 감겨있었고 아버지는 전기줄을 당기셨다. 그 순간 나는 생각했다. ‘그래. 기왕에 죽을 바에야 아버지한테 죽자.’ 점점 목이 조여왔다. 정말로 고통스러웠다. 사실 그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내가 열두살때 아버지는 열탄불을 피워놓고 아궁이를 열어 놓으셨다. 난 그 때 오줌이 마려워서 일어났다가 온 방안에 뿌옇게 연기가 찬 것을 알았다. 머리도 아프고 속이 미식미식거렸다. 나는 아버지를 불렀다. 나중에서야 그 사실을 알게되었다. 그 때 내가 만약 죽었더라면 더이상의 고생은 없을 텐데 참으로 목숨이란 것이 끈질기다는 생각을 했다. 또 요한의 집에 있을 때 어느 사람에게 길을 비켜주다가 휠체어에서 같이 구른 적이 있다. 그 집의 마당은 비탈길이었고 행로였다. 그 때문에 나의 얼굴은 완전히 깨져버렸다. 그 때 만약 차가 옆으로 지나갔더라면 나의 목은 없어졌을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 때는 내가 왜 그렇게 내가 겁이 없었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나의 사춘기 방황은 2년동안 부모님을 힘들게 했다. 나의 10대는 이렇게 지나갔다. 아버지도 돌아가셨고 나의 방황도 이렇게 끝이 났다. 이렇게 20대에 접어들게 되었다. 그러나 점점 나이를 먹어 가면서 내가 언젠가는 어머니와 헤어지고 나 혼자 살아가야 할텐데라는 생각이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다. 나는 그것이 무척 겁이 났었고 불안했었다. 그 때마다 어머니가 아프시지만 나는 아직 어리니까 조금 더 어머니와 살고 싶다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사춘기때부터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장난으로 피우기 시작한 담배를 지금도 끊지 못한다, 아니 끊을 수가 없다. 담배를 피우는 것은 나의 유일한 낙이다. 술은 아버지도 전혀 입에 대지 않고 어머니도 싫어하셔서 나 역시 술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 작은 형도 못 먹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니가 혼자서 안팎의 일을 보셨다. 낮에는 어머니가 가게를 보시고 새벽에는 내가 가끔 4시까지 보기도 했다. 그러나 가게도 잘 되지않고 부업도 그만 두어 집안이 점점 기울어져갔다. 수입은 줄고 지출만 많아졌다. 그 때부터 어머니께서는 신용 하나만으로 남의 돈을 빌려오셨다. 한마디로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격이다. 그리고 그 빚은 눈덩어리만큼 불어났다. 그 때 작은 형은 군대를 가지 않고 의경으로 제대한 뒤 전문대학에 복학하여 졸업을 하였다. 그리고는 전공에 맞은 직장에 취직을 했는데 자기의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그만 두고 시험을 봐서 국가 공무원이 되었다. 그 기간에 어머니는 형을 장가 보내고 전세 집도 장만해 주었다. 어머니와 나는 단 둘이서만 살았다. 내가 점점 머리가 커지자 어머니의 하는 일에 자꾸만 반대가 많아졌다. 내가 보기에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하는 일을 어머니는 그게 살아가는 법이라고 나에게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와 어머니는 자꾸만 마찰이 심해질 수 밖에 없었다.
나의 작은 형과 나는 나이가 4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아마도 작은 형이 없었더라면 나혼자 무척 외롭고 또 괴로웠을 것이다. 우리 형제는 우애가 돈독하지는 않았지만 정이 깊었다. 우리는 장난도 치고 싸우기도 많이 싸웠다. 싸울 때는 물불 가리지 않고 싸우기도 했다. 싸우면 무조건 내가 힘이 밀리기 때문에 내가 졌다. 그러다가 나는 기회를 보아서 한방을 가격하고 도망갔고 그러면 형이 죽겠다고 구르면서 “야! 이리와봐 이 자식아!” 그러면 나는 “안가! 요놈아!! 가면 때릴려고?” “에이! 나쁜 놈아!” 나중에 형한데 뒤지게 맞았다. 어머니, 아버지는 볼 일 보고 들어 오실 때 5원 짜리 떡볶이를 500원어치 사가지고 오셨고 내가 하나 먹을 동안 형은 4개씩 먹었다. 그렇게 매일마다 이런저런 이유로 많이도 싸웠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좀 유치하고 철이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1986년 5월에 나에게도 신검 통지서가 왔다. 형은 사진을 찍고 병원에 가서 진단서를 끊으려다가 골치가 아프니깐 직접 병무청에 가는 것이 빠르겠다고 했고, 모두들 그것에 찬성하였다. 법무청에 도착했더니, 우리보고 잠시만 기다리라고 했다. 그러나 두시간이 넘어도 아무도 상대해 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떤 사람이 흘낏 보더니, “왜 왔습니까? 가세요!”라고 하는 것이었다. 결국 우리는 분한 마음을 가슴에 안은 채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형은 의경으로 가기전 82년 크리스마스에 자기의 애인을 데리고 와서는 나에게 처음으로 소개시켜 주었다. 형의 애인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직장에 다니면서 일주일에 한 번씩 일요일마다 집에 와서 나하고 놀아주곤 했다. 그리고 그녀는 나의 온갖 잔심부름들을 다 들어주었고, 나의 말동무도 되어 주었다. 나는 정말로 그녀가 고마웠다. 88년 형과 결혼을 한 후에도 줄곧 그녀는 나의 동반자처럼 나를 도와주곤 했다. 아기를 낳고서도 매일마다 우리집에 와서 나와 장난 치고 놀아주었다. 우리는 형수와 시동생사이가 아니라 친구사이처럼 허물이 없었다. 어머니가 계시지 않을 때면 우리는 거의 반말로 대화를 주고받곤 했다. 난 한번도 형수와 갈등이 없었다. 작은 형수는 나의 눈빛만 봐도 나의 마음을 알 수가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어머니께서 밥을 먹으라고 밥상을 들고 오실때 내가 옆눈으로 맛있는 반찬이 있나없나를 보고서 없으면 먹지 않겠다고 할 때가 있었다. 그러면 우리 형수는 “삼촌은 고기가 없으니깐 먹기 싫어하는 거 내가 다 알지요.” 라고 했다. 그 만큼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었다. 재미있는 비디오가 나오면 밤 늦게에도 전화를 해서 가지고 가라고 했다. 지금은 좀 나이가 먹어서 그렇지만 전에는 예뻤다, 똑똑하고 야무지고. 내가 한참을 고민하고 있을 때 우리 형수는 나에게 말했다. “삼촌, 걱정마. 어머니께서 돌아가시면 우리하고 같이 살면 되지. 너무 고민하지마.” 난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벅차옴을 느낄 수가 있었다. 우리 형도 나에게 그랬다. “걱정하지 말고 네가 먼저 죽나, 내가 먼저 죽나보자. 아직은 모르지만 내 동료들을 보니깐 사람은 갑자기 죽을 수도 있더라. 그러니까 앞날에 대해서 너무 걱정마라. 너무 마음에 두지 마라.” 나는 말이라도 고맙다고 했다. 난 어릴 적부터 이상하게 형하고 같이 살기는 죽어도 싫었다. 지금도 이렇게 형과 떨어져서 사는 것이 잘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설사 같이 산다고 하더라도 언제까지나 같이 살 수 있을까? 함께 살았다면 얼마나 갈등이 많을까? 서로 불편한 점이 많을 것을 알기 때문에 난 싫다. 형은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있으니 생각을 해보자고 했다.
사춘기 시절에 나만의 공간을 갖고 싶다고 아버지에게 때를 썼다. 아버지는 며칠동안 생각하시더니, 나에게 가게내에 두 평 남짓한 작은 방을 만들어 주셨다. 책상을 놓고 두 사람이 누우면 딱 맞는 공간이었다. 작은 공간이지만 나는 행복했다. 자유롭고, 편했다. 형이 장가간 후엔 형의 방은 자연히 내 방이 되었다. 그리고 옆문이 뚫려서 안방을 마음대로 왔다 갔다 할 수 있게 되었다. 난 그곳에서 집을 나오기 전까지 고민과 좌절을 겪은 시간들이 많았다. 내 방에는 TV와 비디오, 오디오가 있었고, 내 머리 옆에는 전화기와 그 옆에는 담배와 라이터, 그리고 재떨이가 있었다. 그리고 책꽃이에 책이 가득하게 쌓여있었다. 난 매일마다 밤에 비디오를 밤새도록 두세편을 보고 새벽에야 잠이 들었다. 거의 6년동안에 2천편 남짓,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보았다. 왜? 영화를 사랑하니까. 여자보다도 더 영화를 사랑한다. 내가 소장하고 있는 테이프는 100개 정도 된다. 눈을 뜬 뒤에 한 두 시간 동안 내가 제일 먼저 하는 것은 전화를 거는 것이다. 비디오 가게에 신프로가 무엇이 나왔나 알아보고 나서 내 취향에 맞는 비디오를 빌려본다. 재미있는 비디오가 있으면 꼭 어머니와 같이 보곤했다. 어머니께서도 좋아하셨다. 92년에 ‘결혼이야기’의 시나리오를 본 뒤, 한 참 배꼽잡고 웃은 기억이 있다. 난 그 때부터 획기적인 시나리오를 기회가 되면 한 번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머리가 나빠서 뜻대로 되지 않는다. 내가 한번 지어보고 싶은 시나리오가 어떤 것이냐면 한 정신과 의사와 조직 폭력배 보스가 결탁하여 전국적인 조직적인 조직 폭력배를 통합하여서 두개 조의 특공대를 훈련시킨다. 한 조는 자살조, 또 한조는 자폭조 인데 이들을 1년동안 훈련을 시키고 모 건설 회장 간부를 협박하여서 설계도면을 입수한 후 일본 야쿠자에게 도움을 받는다. 무기는 러시아 밀매상에게서 구입한다.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놓은 뒤 16대 대통령 취임식이 있는 그 시각에 서울 서초동에 있는 대 검찰청을 파괴한다. 그것으로하여 이 이야기는 끝난다. 영화마다 다들 하나같이 악은 지고 선은 이기는 것에 질렸다. SF영화 역시 마찬가지이다. 똑같은 내용, 똑같은 그림. 이젠 정말로 신물이 난다. 물론 내 시나리오 내용으로 영화를 만들면, 자연히 상영금지가 될 것이다. 그러나 난 용공분자가 아니다. 어릴 적 부터 아버지에게 철저한 반공 교육을 받았다. 다만 이런 시나리오를 한 번 써 보고 싶다는 것일 뿐이다. 쉬리같은 영화는 10대와 20대의 취향에 맞는 영화이지만, 내 시나리오는 30대와 40대까지 볼 수 있는 영화이다. 난 그 정도로 영화를 사랑한다. 그리고 나는 무속신앙 같은 책에 관심이 있다. 재미있게 보는 책은 추리 소설이다. 김성종의 소설들은 거의 다 읽었다. 난 한번 책을 손에 잡으면 밥도 안 먹고 밤새도록 끝난 때까지 본다. 그래서, 어지간하면 책을 보지 않는다.
난 20대 초반에 어머니에게 복에 겨운 투정을 했었다. 그 이유는 나와 형이 너무 비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와서 생각해 보면 그것들이 모두 나의 열등감에서 나온 과민반응으로 생각된다. 그러던 어느날, 꽃동네 회원인 우리동네 여인숙 아저씨가 자꾸만 나보고 꽃동네로 가자고 했다. 난 그 전부터 꽃동네란 이름 부터가 싫었다. 그리고 고정관념이 꽉 박혀있었다. 그것은 바로 꽃동네는 신부와 거지, 그리고 부랑아들이 사는 곳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TV에 꽃동네가 잠깐이라도 소개가 되면 난 채널을 돌려버렸다. 실은 꽃동네 뿐만이 아니라, 나 같은 사람들이 TV에 나오면 TV를 꺼버렸다. 그러나 나이가 먹자 어느새 그들을 유심히 살펴보게 되었다. 난 꽃동네란 곳이 이상하게 싫었으나 20분짜리 꽃동네 비디오를 아무 생각없이 보곤 했다.
집을 떠나기 전 93년 겨울에 난 지독한 독감에 걸렸었다. 거의 보름 동안 밥을 먹지 못하고 이불을 깔고 누워 있었다. 점점 힘이 업어지고 다리가 마비되어 왔다. 또 양무릎이 붙었다. 아무리 약을 적고 진통제 주사를 놓아도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난 갑자기 생각이 났다. 몸 속에 알코올이 들어가면 조금 나아질까하고. 그래서 어머니께 소주를 좀 가지고 와 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숨을 쉬지도 않은 채 난 어머니께서 가져다 주신 소주를 단 숨에 들이켰다. 3분쯤 지나자 붙었던 다리가 거짓말처럼 풀렸다. 그 후로 난 소주를 거의 매일마다 마시다시피했다.
나는 가끔 집에 있는 것이 답답하고 짜증이 나면 영업용 차를 타고 한바퀴 시원하게 드라이브하는 버릇이 있다. 그리고 87년 내가 좋아했던 여자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산만에서 회도 먹고 재미있게 놀다가 왔다.
난 자존심 강해서 형에게는 아무리 궁금한 것도 물어보지 않는다. 국어 사전 사 가지고 궁금한 것 있으면 틈틈히 사전을 찾아 준다.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
원래 형하고 의견 충돌이 가끔 있다. 형은 나를 보고 대가리 속에 똥만 가득 있다고 한다. 왜 그렇냐하면 형의 사고와 내 사고는 조금 차이점이 있다. 어쨌든 말다툼이 좀 자주 있다. 우리 형수는 이빠는 소리를 잘 한다. 듣기 좋은 소리보다 듣기 나쁜 소리만 자주 한다. 그래도 나는 밉지 않다. 우리 동네에는 점쟁이 할머니가 살았다. 그 할머니는 우리 집에 매일 오다시피 가게도 봐주고 나와 말동무도 되어주곤 했다. 난 무속에 관심이 좀 많아서 궁금한 것은 무엇이든 물어보았다. 그리고 나의 사주도 물어보았다. 할머니께서는 몇가지 이야기를 해주셨다. 내가 어디로 가든지 대우도 받고, 인덕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수녀님하고 같이 생활한다고 하셨다. 난 죽으면 죽었지 수녀님 곳으로는 안 간다고 했다. 그리고 또 나는 어머니의 마지막 임종을 보기가 힘들다고 하셨다. 난 그게 좀 마음에 걸린다. 아버지는 임종 못 봤는데 어머니까지 못 보면 천하에 둘도 없는 불효자가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가 나이가 38살이 되면 여자 있다고 한다. 그 여자는 난 모르는 병이 있다고 한다. 나와 부부처럼 산다고 했다. 그것은 앞으로 보고 봐야지 있으면 좋고 없으면 그만이다. 만약 있다면 정말 좋을텐데 난 어릴적부터 나 혼자 사는게 그게 소원이다. 그리고 마지막 한가지 나는 죽을때 좀 고통스럽게 죽는다고 말씀하셨다. 난 그 얘기 듣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20년 전부터 한달에 한번 두번씩 밤에 자다가 숨이 40초간 멈춘다. 갑자기 몸부림치고 지랄하다가 숨을 수니다. 난 이미 알고 있다. 내가 죽을때는 이렇게 해서 죽는다고 이미 각오가 되어있다. 지금도 갑자기 숨이 멈춰질때가 있다. 숨이 멈춰질때마다 이게 마지막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 할머니 말이 어쩌면 맞는지 모른다. 지금에 와서 가만히 보니 할머니의 얘기는 거의 다 맞는다고 생각한다.
난 성격이 아주 많이 바뀌어 졌다. 그전에는 보수적이고 부끄러움도 잘 타도 고집도 세고 여자는 절대 바람을 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불의와의 타협도 안되고 범법도 안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거의 다 바뀌어졌다. 여자도 경우에 따라 바람필수도 있고 또 경우에 따라 불의와의 타협도 할 수 있다. 나의 사고가 나쁜건지 좋은 건지 모르겠지만 피곤한 성격은 싫다. 이제 완전히 성격이 바뀌었다. 고집도 좀 없어지고 성질도 많이 누그러졌다. 그래도 내 머리속에는 또 깨부셔야할 것이 많이 있다. 그건 나도 알고 있다. 앞으로 10년 후 20년 후 내 모습은 변해 있을까? 그건 아무도 모른다.
난 어머니하고 같이 사는 동안 거의 다 어머니에게 못 살게 굴었다. 막내 아들이라고 또 몸이 좀 아프다고 어머니가 아버지보다는 정을 많이 줬다. 그래서 어릴때부터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많이 받고 컸다. 아무런 구김살 없이 컸다. 형이 장가 가고 난후 어머니와 난 둘이 살았다. 난 어머니가 좀 피곤하시면 잠깐 눕는다. 난 그 때 옆에서 가만히 가서 어머니의 젖가슴을 만져보기도 하고 뽀뽀도 한다. 그러면 어머니께서 날 떠 밀었다. 그것은 내가 집떠날 때까지 가끔 하는 일이었다. 그만큼 어머니와 나는 서로에 대한 애정이 깊었다. 난 뭐하나 갖고 싶은 건 꼭 가져야지 직성이 풀리는 놈이다. 어머니가 그만큼 힘들었다. 입에 맞는 반찬이 없으면 안 먹고 중국집에 시켜먹곤 해싿. 그만큼 내가 피곤하게 굴었다. 고집도 세고 참 그때는 와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한동안 우울증에 걸려 한달동안 고생해본적도 있다.
어머니와 의견 충돌이 좀 많아 내가 나이를 좀 먹자 어머니가 하시는 일이 싫어졌다. 그리고 나도 이런 자신이 싫고. 난 어릴적부터 어머니에게도 어디 놀러 갔다하면 못 가게 회방을 놓았다. 그 까닭은 어머니가 놀러가시면 내가 많이 불편하기 때문이다. 단지 그 이유였다. 그래도 어머니께서는 제주도까지 놀러가셨다.
난 20대 초반 크게 고민을 안 했다. 점차 나이도 먹자 뇌속에 박혀있던 고민이 나오고 말았다. 이젠 갈때가 다 됐구나 하고 마름도 불안하고 초조하고 매일 가위에 눌리고 깊은 잠이 안든다. 1시간 내지 2시간 정도 잠이 든다. 잠이 깨면 또 술을 먹고 그렇게 반복된 생활의 연속이었다. 집안은 빚쟁이들이 오고가고 오고가고 전화가 불통이고 어머니께서는 돈을 구해와 여기저기 다니시고 하루종일 집에 안계신다. 난 배고프면 나 혼자 김밥이나 뭐나 집어 먹고 난 직접적인 건 모르지만, 간접적으로 빚이 얼마만큼인지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나는 차마 작은 형에게 못 말했다. 그렇게 지겨운 나날들만 보냈다. 1994년 어머니의 생신날 식구들한테 어머니가 직접 말씀하셨다. 나는 좀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많은 줄은 몰랐다. 그 이후부터 더 힘들 생활이었다. 금융실명제때문에 어머니가 더욱 힘들어 하시는 듯하였다.
난 도저히 계속 집에 있으면 미칠것만 같았다. 잠시 어디라도 바람 좀 쐬어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 마침 어머니께서 요한의 집에 한 번 가보라고 하셨다. 어머니께서 맨날 입버릇처럼 나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네 갈길을 가야지 내가 죽더라도 눈을 감을 수 있겠다.”
“네가 안간다면 내가 죽더라도 어떻게 눈을 감겠냐?”
“엄마, 걱정말아 내가 삼십 넘으면 가지 말라고 해도 간다.”
난 차마 어머니만 혼자 두고 나 혼자만 빠져나올수가 없었다. 그건 비겁한 짓이고.. 하지만 현실은 달았다. 내가 있는다고 해서 크게 도움될것도 없고, 괜히 어머니만 더 괴롭히는 것 밖에는 안 되는 것같았다. 어머니께서는 요한의 집을 먼저 가보시고 난 뒤 나보고 말씀하셨다.
“원장님께선 너보다 몸이 더 불편하시다. 그 곳에 한번 가봐라.”
난 그 얘기가 믿겨지지가 않았다.
점점 집안도 기울어가고 어머니께서도 연로하셔서 몸도 불편하셔서 나보고 자꾸만 귀에 못이 박히도록 가라고 하셨다. 결국 한번 가보기로 결심한 난 어머니보고 한마딘만 했다.
“엄마 보고싶으면 어떡하지?”
어머닌,
“보고 싶긴 뭐가 보고 싶냐?”
하면서 눈가에 눈물이 가득 맺혀있는 모습이 보였다. 어머니보고
“그러면 2-3일 정도 다녀올테니 아주 가는 건 아니다.”
하고 분명히 말을 해주었다. 그해 여름 무지무지 더운 날 기온이 39도 에서 40도 까지 오르내리는 날씨, 저녁 결국 나는 요한의 집의 차에 몸을 실었다. 그게 집과의 내 마지막 날이었다. 28년동안 부모님의 그늘에서 행복하겠 살았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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