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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1999.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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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06 16:43:17

나의 작은 자서전

 

 

 

 

1999.12. 배덕민

 

 

-이 글은 자서전이 아니고 수기도 아니다. 그렇다고 일기도 아니다. 다만 나의 느낌과 생각나는 대로 적어놓은 기록이다.-

 

 

 

 

1. 28년의 삶 (1967~ 1994)

 

 

2. 요한의 집 (94.7.18)

 

 

3. 가나안 기도원 (97.1.18)

 

 

4. 나눔의 집 (98.7.14)

 

 

5. 건국대학 부속병원 (일주일 입원. 98.7.24)

 

 

6. 꽃동네 입소 (98.8.5)

 

 

1. 28년의 삶

 

 

나는 19677월에 인천 북구에서 태어났다. 태어나자 마자 난 울지 않았다. 그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아침 9시에서 저녁 5시까지 움직이지 않은채 있었다. 그리고선 그 뒤에야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아버지는 죽으면 죽고, 살면 살라고 나를 한 쪽 구석에 내버려두셨다. 작은 아버지가 술이 취하면 우리집에 와서 아버지와 어머니께 욕설을 퍼붓고 행패를 부려서 싸우다가 자주 넘어지셨다고 했다고 어머니께서 나에게 귀가 따갑도록 말씀하시곤 했다. 그리고 그 때는 바로 내가 어머니의 뱃속에 있었을 때였다. 어머니께선 나의 작은 아버지때문에 내가 병신이 되었다고 하셨다. 나의 병명은 뇌성마비이다. 특징은 몸이 부자연스럽고 말은 제대로 못하는데 두뇌는 정상인보다 훨씬 좋다. 그리고 심장이 약하기 때문에 통계적으로 볼 때 수명이 50을 못 넘긴다. 지금도 나는 한여름에도 뜨거운 물로 머리를 감아야 한다. 찬물로 머리를 감으면 숨이 막힌다.

작은 아버지를 피해서 경기도 송탄으로 이사를 왔다. 아버지는 이사를 오자마자 방이 12, 가게가 2개에 땅이 40평 남짓한 집을 샀다. 그런데 그 집은 우리가 이사오기 전에 도시계획에 걸려 있는 상태였다. 아버지는 그 사실을 모르고 그 집을 사셨다. 76년에 육교가 생기는 바람에 우리 집은 철거가 되었다. 그 바람에 우리는 옆집으로 이사를 갔다. 지금도 그 집만 계속 남아 있었다면 지금쯤은 그래도 조금은 넉넉하게 살지 않을까하고 생각한다. 부모님의 본업은 담배가게 장사였고 부업은 특수한 직업이었는데 그것은 일명 아가씨 장사라고 불렸다. 때문에 나는 어릴적부터 나쁜 것만 듣고 보고 했다. 그래도 우리 부모님께서는 자식만은 올바르게 가르치려고 노력하셨다.

난 어린 시절에는 시험지와 볼펜만 있으면 행복했다. 매일마다 엎드려서 그림을 그리고는 했다. 그래서 내 주위에는 항상 그림을 그리기 위한 시험지 300장과 볼펜 1다스가 있었다. 내가 7살때 국민학교 취학 통지서를 받았으나 아버지는 나를 학교에 보내지 않으셨다, 아니 보내지 못하셨다. 지금도 아버지께서는 그것을 후회하고 계시다. 내가 만일 국민학교만 졸업했으면 나의 운명이 뒤바뀔 수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그 때는 도저히 불가능했다. 나의 병을 고치기 위해 좋다는 약, 좋다는 음식, 좋다는 무당에게 다 가보아도 듣지를 않았다. 결국 어머니께서는 신발을 씻기시고 걸음마를 시작시키셨다. 그런데 위장병이 있으셨던 어머니께서는 내 머리가 자꾸만 어머니의 배에 힘을 가했기 때문에 그것도 포기하셨고 작은 형이 자꾸 이불을 붙잡고 일어나는 연습을 시켰다. 나는 넘어지면 아플까봐 겁이 나 하지 않았다. 그 때 참고 연습을 제대로 했으면 지금쯤 목발을 짚고 다닐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는 어릴 적에 개구장이여서 나가서 동네 친구들과 구슬치기, 딱지치기, 야구, 축구등 온갖 놀이는 다 좋아했다. 여자 친구도 있었다. 그러나 나이를 먹을 수 록 친구들은 나에게서 멀어져 갔다. 지금은 단 한명의 여자친구만 남아있는데 그녀는 지금은 아이가 두명있는 어머니가 되었다. 그리고 외사촌들이 특히 고마웠다. 지금 생각해봐도 정말 고마울 따름이다. 국민학교 때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땎까지 아니 사회인이 되어서도 가끔 나를 보러 와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방학때가 되면 일주일씩이나 열흘씩 나하고 놀아주고 갔다. 동갑내기도 있었고 나보다 나이가 많거나 적은 사람도 있었다. 어쨌든 아주 재밌게 놀았다. 반면에 나의 친가쪽에서는 왕래가 없었다.

나는 방에서만 놀았다. 어디서 소문을 듣고 왔는지 우리 이종 이모가 어머니께 큰 병원이 있는데 거기에는 외국 의사도 있으니 한 번 덕민이를 데리고 가보라고 했다. 그 다음날 오후 숲속을 가다가 보니 아주 큰 병원이 나왔다. 의사가 나를 만져보더니, 아버지에게 이 병은 전세계적으로 못 고치는 병이니까 다음에 우리가 연구하면 매스컴에 나오니까 그 때 한번 찾아오라는 한마디의 형식적인 말을 했다.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의 발걸음이 아주 무거워 보였다. 어머니께서는 나를 붙잡고 한없이 우셨다. 그 뒤로 부모님은 나에 대한 희망을 완전히 포기하셨다. 어머니께선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동네 아주머니의 권유로 일주일 동안 새벽에 나를 등에 업고 교회에 가셨다. 그 기간은 안수기도를 하는 기간이어서 사람들이 많이 오고 했다. 안수를 받는 동안에은 1분동안 혼자 서 있었을 수 있었으나 그 뒤에는 아무런 효과가 없었고 나도 그 때 멋모르고 있었다. 우리 집안은 종교를 믿는 사람이 없었다. 원래 난 수녀님이나 신부님, 목사, 스님을 고리타분하게 여겼다. 또 답답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체질적으로 나와는 맞지 않았다. 지금도 나는 조금 그 전보다는 생각이 많이 바뀌었는데도 조금 싫다. 그런데 나는 어릴 적부터 암자에 한 번 가보고 싶은 생각이 많았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가 볼 기회가 없었다. 언젠가 꼭 한 번 가보고 싶다.

어머니께서 완전히 나를 포기하신 뒤로 일곱살, 여덟살이 되어도 아무도 나를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었다. 결국 나 혼자 TV에 글자가 나오면 무조건 머리에 기억을 시켰다. 그런 식으로 국문을 다 깨우쳤다. 지금도 생각하면 참 신기하다고 느낀다. 그 때 만일 나도 관심이 없었으면 지금쯤 답답해서 어떻게 살 지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가,,,라는 하나도 모른다. 그냥 무조건 글자만 쓰고 읽고 그랬다. 우리형이 수집하고 있는 우표를 나보고 네가 모아라라고 나에게 주었는데, 그 때부터 나는 아버지께 혼나면서도 열심히 우표를 모았다. 그 때는 우표를 수집하는 것이 붐이었기때문에 서울우표사의 회원에 가입하여서 우표를 모았다. 그 때 모은 우표 책이 거의 10권 남짓 된다. 덕분에 돈도 꽤 많이 들었다. 난 어릴 적부터 담배 연기가 너무나도 싫었다. 나는 생각했다. ‘이다음에 크면 손이 내 마음대로 안 되니깐 담배는 관두고 빨대로 마실 수 있으니까 술이나 마셔야지라고. 그러나 지금은 담배 골초가 되어버렸다. 열두 살까지 어머니, 아버지가 나를 안고 대, 소변을 받았다. 그 다음엔 나 혼자 볼일을 봤다. 때문에 어린 시절을 답답하게 보내야만 했다. 영화를 좋아했기 때문에 동네 극장에 자주 가곤 했다. 지금도 영화를 볼 기회는 있지만 내 취향에 맞지 않아서 보지 않는다. 그리고 난 편지쓰기를 좋아해서 외사춘하고 편지를 주고 받았다. 그와 그렇게 10년을 넘게 편지를 썼다. 덕분에 문장 실력이 조금 나아졌다고 생각한다.

나는 아버지에 대한 추억은 별로 없다. 우리 아버지는 보수적이고 완고하셨다. 그래서 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집에 손님이 오거나 친척분이 오시면 입에 침이 마르도록 나의 칭찬을 하셨다. 내가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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